나는 사랑의 신이 태어나기 전에 죽은
어느 옛 연인의 유령과 이야기하고 싶다
그때는 아무리 사랑에 미쳤더라도
자기를 경멸하는 여자를 사랑할 정도로 비굴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 후로 사랑의 신은 운명을 만들고
비뚤어진 제 2의 천성을 생기게 하였으니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라도 사랑할 수 밖에는 없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 사람이 나에게는 전혀 관심 없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나는 마음 속으로 묻곤 한다. 어느 한 쪽의 간절한 마음이 점잖은 무시나 싸늘한 경멸로 보답 받는 관계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고. 더욱 얄궂은 것은 그런 대접에도 불구하고 쉽게 냉정해질 수가 없다는 거다. 사랑의 반대말이 무관심이라고 그러니 차라리 무심해질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가슴 속에서 품은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분노의 감정뿐. 아직도 놓아버리지 못한 사랑과 독나무처럼 자라나는 분노 가운데서 갈팡질팡 하다가, 시간이 한참 지난 뒤 문득 생각해보면 의아하기만 하다.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기는 한 건지, 그런 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
물론, 그를 신으로 만든 자들도 그렇게 만들 생각은 없었고,
또 사랑의 신도 애초에는 그렇지가 않았었다
똑같은 불길이 두 마음 태울 때
사랑을 주는 자와 받는 자를 너그럽게 짝지어 주는 것이 그의 임무였고
상호 응답케 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내가 사랑한들 그걸 사랑이라 할 수는 없으리라
그런 관계가 가장 고결한 형태의 사랑으로 칭송 받았던 때도 있었다. 르네상스 시기까지만 해도 가장 고결한 형태의 사랑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소위 궁정 연애(courtly love)였다. 원래 중세시대의 결혼이란 사업상 이해관계나 정치적 동맹에서의 담보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궁정 연애의 내용은, 가신인 남성과 그가 섬기는 귀부인과의 관계 같이 거의 예외 없이 혼인관계를 벗어난 부정한 사랑이었다. 현세에서 육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사랑이었고, 따라서 그 성격도 일방적인 헌신으로 표현되는 경애심에 가까웠다. 여기에 성모 마리아에 대한 종교적 사랑과, 사랑을 충성스런 봉사를 필요로 하는 달콤한 열병으로 보는 아랍적 관념이 결합하여, 이제 남성은 자신이 사랑의 신을 섬긴다고 믿으며 상대방 여성을 여신으로 숭배하는 경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궁정 연애의 관념은 곧 유럽 문학 전반에 스며들었고 기사도 문학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었지만, 알레기에리 단테만큼 이를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가는 없었다. 베아트리체는 살아서는 단테에게 영감의 원천이었으며, 그녀가 죽은 뒤 집필된 ‘신곡La Divina Commedia’에서는 (단테로 추정되는) 작중 화자를 지복의 천국으로 이끄는 성모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모든 신은 이제
주피터만큼이나 막대한 권력을 행사한다
격노하고, 욕정에 날뛰고, 연애편지를 쓰고, 숭배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사랑의 신의 특권
아! 만약 우리가 이 횡포를 깨닫고
이 철부지를 신의 권좌에서 다시 끌어내릴 수만 있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사랑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17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형이상학파 시인인 존 던은 전(前)시대를 풍미한 이러한 사랑의 환상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이런 사랑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시집 ‘연가The Songs and Sonnets’를 관통하는 소재는 사랑이지만, 전통적인 연가의 주제인 사랑의 달콤한 기쁨 외에도 부정적인 사랑의 단면들까지도 숨기지 않는다는 점에는 영문학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없다. ‘사랑의 신Love’s Deity’ 역시 던의 시 가운데 부정적인 사랑을 다룬 것들 중 하나로, 이 시에서 던은 언제까지나 구애를 거부하여 남성을 지치게 만들었던 여성을 다룬 기사도 문학에서의 사랑의 주제를 비틀어 반대로 발전시킨다. 다시 말해, 던이 ‘사랑의 신’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랑은 남녀 두 사람 사이의 호혜적인 관계 속에서만 제대로 싹트고 자라날 수 있는 감정이므로, 어느 누구도 사랑받지 않고서 사랑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어찌 반역자나 무신론자처럼 불평하랴
마치 사랑의 신에게서 최악의 대접을 받은 것처럼
사랑의 신은 나로 하여금 사랑을 포기하게 할 수 있고
그녀가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어 더욱 깊은 고뇌 속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걸 원치 않는다. 그녀는 이미 연인이 있는 몸이니
거짓은 증오보다 더 큰 죄악
내가 사랑하는 그 여자가 만약 날 사랑한다면 그것 또한 거짓이리라
– 존 던, ‘사랑의 신’
그렇게 보면 던의 ‘사랑의 신’을 제사(題詞)로 차용한 ‘The Hellbound Heart’를 짝사랑에 관한 일종의 알레고리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 Julia는 Frank를, Rory는 Julia를, 그리고 Kirsty는 Rory를 사랑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여기에 합당한 사랑으로 보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의 사랑은 던이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한 바로 그것이다. 이 어긋난 짝사랑의 결말에는 배신과 환멸, 그리고 피의 보복만이 기다릴 뿐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는 평생 조작해도 꿈쩍도 하지 않으면서, 또 어떤 이는 잠깐 만지는 것만으로도 “낙원”의 문을 여는 뮤직박스 르마샹의 상자는 어떤 이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이루어지면서도 또 어떤 이에게는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쳐도 잡히지 않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관한 은유이다. 그렇게 보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르마샹의 상자를 일컫는 정확한 명칭이 Lament Configuration, 즉 ‘비탄(悲嘆)의 상자’라는 것은 꽤 의미심장하다.
또한 이들의 관계 속에서 ‘상처의 종단’ 수도승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주목할 만하다. 전신을 뒤덮은 그 어마어마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따라서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완전히 무심하다. 대신에 그들은 타인의 진심을 거부한 자들, 타인의 아픔을 헤아릴 줄 모르는 자들을 자신들의 세계로 끌고 가 마치 응징이라도 하듯이 끝없는 고통 속에 내던진다. 따라서 던의 시에 등장하는 사랑의 신(그리스 신화의 큐피드)이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장난치는 철부지 폭군이라면, 수도승들은 무자비하기는 하나 공정한 심판자이자 전도된 의미에서의 “사랑의 신”이라 할 만하다.
한마디로 이 소설 ‘The Hellbound Heart‘는 응답 받지 못한 사랑을 위한 씁쓸한 애가(哀歌)인 셈이다. 다만 그 씁쓸함에서 피비린내가 묻어나는 게 여느 사랑 이야기와는 다를 뿐.
‘The Hellbound Heart‘는 원래 1986년 ‘Night Vision‘이라는 호러 앤솔로지의 3권에 수록되었던 중편으로, 이를 영화화한 ‘Hellraiser‘(1987)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1991년 HarperCollins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영화가 주목 받게 된 것은 16세기 벨기에의 해부학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해부학 서적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De Humani Corporis Fabrica’에서 착안한 섬뜩한 사도-마조히즘적인 이미저리 때문이기도 하며, 그런 점에서 영화는 소설에서 완전히 표현하기 힘들었던 측면을 효과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결말 부분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소설 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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