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amnation Game – Clive B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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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이 후퇴한 뒤 붉은 군대가 접수한 전후 바르샤바. 처형당한 나치 부역자들의 시체를 태운 재가 대기를 가득 메우고 폐허가 된 도시 위에 수북이 쌓인 이곳에서는 학살과 강간, 약탈이 이미 일상이 되어 있다. 이곳에서 한 ‘도둑’이 이름난 도박사를 찾고 있다. 그 도박사의 이름은 머몰리언. 그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카드 게임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으며 그와의 게임에서 진 사람들은 모두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는 믿기 힘든 소문들만이 무성한데, 그래서인지 심지어는 인간이 아니라는 이야기까지 나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도둑’은 마침내 그를 찾아내서 게임을 하게 된다.
40년 후, 도박 빚을 갚기 위해 현금수송차량을 습격하다가 살인을 저지르고 복역 중인 마티 스트로스에게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 들어온다. 유럽 최대 제약회사의 총수, 조셉 화이트헤드의 경호원이 되는 것을 조건으로 가석방시켜준다는 것. 마티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화이트헤드의 도피처 –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과 감시 카메라, 사나운 경비견들이 지키는 그의 대저택에서 함께 머물게 된다. 마티는 자신을 신뢰하는 이 괴짜 억만장자에 대해 경멸과 애정을 동시에 느끼면서, 마약중독자인 그의 딸 캐리즈와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바로 마지막 유럽인(the Last European)- 마물리앙이 머지않아 되돌아 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40년 전 바르샤바에서의 카드 게임으로 부와 권력,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 마물리앙을 배신하고 그를 내쳤던 것이다. 마물리앙은 자살한 연쇄살인마 앤소니 ‘the Razor-Eater’ 브리어를 죽음으로부터 되살려낸 다음, 캐리즈를 인질로 잡고 화이트헤드를 위협한다. 이제 마물리앙이 원하는 것은 과거에 내걸었던 조건의 충족, 바로 화이트헤드의 죽음이다.

‘The Damnation Game’을 읽었다. 사실은 작년에 다 읽었지만… 이제야 감상문을 쓰는 거다. 기억이 좀 가물가물하는데, 역시 감상문은 읽고 나면 바로 써야 된다는 걸 실감한다.

이 작품은 소위 스플래터펑크(극도의 신체훼손이나 유혈 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공포소설의… 서브장르? 운동? 어쨌든)의 먼 선조뻘 되는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런만큼 묘사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서 다루는 모티프 자체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과격하다. 고문, 참수, 식인, 신체훼손, 유아살해, 변태성욕 등등… 내 경우를 말해 보자면, 캐리즈가 마물리앙의 과거 기억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가 러시아 군이 전쟁포로들을 처형하는 장면(구체적으로는 밝히지 않았지만, 연도를 고려해 보면 아마 1812년의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인 듯하다)을 보게 되는데, 마물리앙 바로 앞에서 북치는 소년(열 너댓살 정도?)이 참수되는 장면이 나온다. 잘려나간 그애의 머리가 피를 뿜으면서 굴러가는 부분을 읽으면서 (뭐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공포감하고는 좀 다른 감정 때문에) 읽기가 상당히 거북했다.

물론 이 작품은 이런 시각적인 충격을 주는 데만 골몰하지 않고, 초자연적 공포소설이 갖춰야 할 으스스한 감정을 환기시키는 것도 잊지 않는다. 미스터 토이를 찾는 마티의 전화에 토이의 죽은 여자친구(토이를 잡으러 왔던 앤소니의 손에 처참히 살해당한 상태이다)가 대답하는 것을 듣고 마티가 오한을 느끼는 장면이라든지, 마티가 카지노 클럽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있는데 등뒤의 좌변기 칸막이 속에서 누군가(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미스터 토이였을 거고, 이때는 죽은 상태였을 것이다) 작은 소리로 흐느끼는 것을 듣는 장면 등에서는 이런 두 가지 종류의 공포가 조화롭게 결합되어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이전에 바커의 단편에서 나타나던 평면성을 깨고 다층적이고 복잡하게 조형되고 또 발전된다. 파우스트 전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 작품에서, 배신당한 메피스토펠레스 역을 맡은 마물리앙은 처음에 냉혈한 악마처럼 묘사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고 과거의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혐오감뿐만 아니라 연민과 동정심을 자아낸다. 마찬가지로 마물리앙이 부리는 앤소니 ‘Razor-Eator’ 브리어 역시 흉물스런 변태 연쇄살인마에서 시작하나, 결국 작품 끝에 언제나 타인들로부터 거절당하기만 하는 인간으로서의 이면이 부각되면서 저릿한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The Damnation Game’은 보통 클라이브 바커의 정수(‘The Quintessential Clive Barker’)라고 평가된다. 클라이브 바커의 작품에 극히 비판적인(“클라이브 바커를 호러의 미래라고 한다면, 이 바닥의 미래는 정말 암울하다.”) 영문학자 S. T. Joshi마저도 ‘The Damnation Game’에 대해서만큼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략)… 하지만 거짓말처럼 이 모든 것들이 ‘The Damnation Game’에서는 바뀐다. 바커는 이전에 쓴 ‘피의 책’에서의 어처구니 없는 결점이나, 이 작품 이후에 쓴 다른 장편들에서의 장황함까지 보상하고도 남을 정도로 흠 없이 번뜩이는 weird novel을 여기서 만들어낸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진짜 weird novel이 갖춰야 할 조건들을 충족시키고 있으며, 그렇지 않다손 치더라도 미스터리나 서스펜스 소설에다 섬뜩하고 초자연적인 사건을 집어넣은 수준에 그친 그저그런 weird tale에 대한 토머스 리고티의 비판은 충분히 피해나갈 수 있다…  (중략) … 자신의 작품 속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바커는 선악의 이분법을 버리고 의지의 충돌을 풍성하고 복잡하게 묘사하고 있다. ‘The Damnation Game’에서는 어떤 결점도 찾아볼 수 없다. 구조는 완벽하고, 등장인물들은 실감나게 충분히 형상화되었고, 문체는 명징하며, 결말은 감동적이고 만족스럽다.”(Joshi, S. T. The Modern Weird Tale: 124-127)

그렇기 때문에 이 작가가 이후 ‘The Damnation Game’을 뛰어넘는(적어도 거기 필적하는 정도의) 작품을 쓰지 못했다는 것은 더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호러와 팬터지를 결합시킨 ‘Weaveworld’는 그래도 꽤 괜찮았지만, 이후 작품들로 갈수록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게 개인적인 감상이다. 읽어본 사람들의 평가에 따르자면 young adult물인 ‘Abarat’이 그런대로 괜찮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랄까. 언제일지는 몰라도 다음에는 본작을 썼던 무렵처럼 날카로움을 유지한 신작으로 돌아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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